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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영  근 (金永根) -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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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근은 1908년 평안남도 순천군 순천읍에서 태어났다. 그 당싱의 선수들이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이 집안도 부유한 편이어서 어린 나이에 평양으로 유학하여 광성소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공부보다는 장난끼가 심해 먹고, 놀고, 운동하는 것이 그이 취미였다.

집안에서는 장차 변호사나 의사가 되길 기대해 평양의 명문교인 숭실중학교에 진학시켰지만 고집스러운 성격과 운동소질은 중학교에 입학하자 마자 축구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이미 축구의 명문이기도 했던 숭실중의 베스트 멤버에 끼었다.

1928 년 그가 2학년 때 숭실중은 조선을 대표하여 제10회 전일본 중학선수권대회에 출전, 우승해 기염을 토했다. 일본의 신문들도 중학교 경기는 그리 크지 않게 취급하는 것이 당시의 상례였는데 김영근의 경우는 대서특필하여 그의 천재성을 칭찬했다.

이렇게 일찍부터 그이 명성이 자자해지자 경성으로부터 스카우트 손길이 뻗히기 시작했다. 경성의 미션스쿨인 경신중학팀이 그에게 손짓을 한 것이다. 경신으로 전학은 쉽게 이루어졌고, 여기서 그는 운명의 라이벌인 김용식을 만나 「막강 경신시대」를 연다. 김용식은 공수의 주축인 하프였고, 김영근은 공격의 해인 센터포워드였다. 

경신중은 골키퍼에 이혜봉, 센터하프에 임창제, 우람한 몸집의 차복준, 김용식 등이 수비를 맡아 철벽을 이루었고 공격진에는 레프트 위의 채금석, 레프트 인너의 최성손, 센터 포워드의 김영근과 그 밖에 김성태등이 포진하고 있어서 막가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 경신중은 이런 실력으로 김영근이 전학해온 다음해인 1929년 4월에 전조선 축구계를 휩쓸었다.

와세다대학은 2년마다 열렸던 극동경기대회(요즘의 아시안게임과 비슷한 성격의 대회로 참가국은 일본, 중국, 필리핀 등)의 일본대표로 출전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조선에 들렀다. 조선에서는 경신중, 조선축구, 숭실전문, 평양 무오 축구단의 4개팀이 와세다와 대전키로 했는데 경신중과의 대전을 거부, 무산될 위기에 있었다.  그러나 타협안으로 졸업생을 포함시켜 경신구락부로 출전했지만 순수한 재학생으로만 뛰어 승리를 따냈으니 보통 장한 일이 아니었다.

김영근, 김용식, 채금석, 이혜봉, 최성손, 김성태, 한우량, 차복준 등이 주축이 된 경신중은 관서체육회 주최의 평양대회에서 숭실중에게만 패했을 뿐 이들이 똘똘 뭉친 2년동안은 만나는 상대가 같은 또래의 중등부는 물론 대학, 일반 팀까지 어떤 팀이건 다 꺾었으니 숭실중에 이어 중학축구의 황금시대를 누렸던 것이다.

경신중 졸업은 1년 앞둔 1929년 11월 광주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제에 항거, 『광주학생 사건』에 경신중 축구선수들이 연루되어 상급생 거의가 퇴학을 당하는 바람에 김영근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경신중 축구팀은 몰락하고 말았다.

김영근은 성질이 불같고 어느 누구에게 아첨같은 것을 못하는 비사교적인 성격이었다. 훈련도 누구에게 떨어지지 않게 열심히 하는 축에 들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생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공 튀기기 등의 훈련을 한 김용식과는 비교가 될 인물이 못됐다.

그래서 둘 사이는 소원해졌지만 김영근은 김용식, 채금석 말고도 골 키퍼인 이혜봉과 그 밖의 친구들을 이 경신시절에 많이 사귀어 두었다.

어떻든 김영근은 이렇게 해서 경성에서의 경신중시절을 청산하고 선의의 라이벌인 김용식과도 혜어지지만 순수한 축구실력만으로 본다면 그 당시의 플레이는 김영근이 김용식보다 한 수 위였다는 것이다.

물론 김영근은 센터 포워드인 스트라이커였고 김용식은 공·수를 겸한 레프트 하프였기 때문에 그 축구기술을 비교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하겠지만 전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김영근이 한 발 앞섰다는 얘기다.

김영근은 선천적으로 볼감각이 뛰어난 데다 경성에는 아는 친구도 별로 없고 축구 말고는 할 일이 별로 없어서 훈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기에 그의 축구실력은 부쩍 늘었다.

경신중 축구부의 와해로 고향에 돌아온 김영근은 무위도식으로 한동안 방황했다. 그때 그에게 평양축구단의 간부들이 다리를 놓아 숭실중학에 2년을 유급시키는 형태로 재 입학시켰다. 숭실중학 축구팀은 김영근을 보강해 1932년 관서 체육회 주최의 전조선 축구대회 중등부에서 우승, 4연패라는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는 숭실중학을 졸업한 뒤 같은 계열인 숭실전문학교로 진학했다. 그가 숭실중학을 졸업하자 이번에는 경성의 보전이나 연전에서는 그를 스카우트하려고 했지만 보은한다는 뜻에서 평양에 눌러 앉았다.


1934 년, 35년의 중국원정 때 그는 완전히 조선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국제적 선수라는 명성을 얻었다. 이때 김영근의 플레이에 매료된 천진의 각 신문들을 그를 『신동』이라고 격찬했다. 『신기를 몰고 다니는 괴동』이라는 제목을 달기도 했다. 중국사람의 허풍은 알아주는 것이지만 자기나라 선수들을 제치고 김영근을 지면이 차도록 칭찬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매료된 나머지 표출된 수식어일 것이다.

김영근은 27세, 한창 꽃다운 나이에 다 펴보지도 못하고 시든 신세가 됐다. 평양에 돌아가 한동안 평야군의 천진원정에 따라 다니는 등 활약을 했지만 방탕한 생활로 나날을 보냈다. 함께 축구를 하다가 일본대표가 되지 못한 평양의 다른 선수들도 울분을 느끼기는 마찬가지여서 이들과 어울려 매일 술판을 벌렸다.

1945 년 1월 일생 최대의 불행을 맞는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북경 교외의 일본인 탄광에서 노무계장의 직책을 맡아 생활하고 있었는데 술을 먹고 중국인 탄광부들과 싸우다가 그만 실명하고 말았다.

이때도 탄광 노무자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정책이 심해 그는 술에 취하면 일본인 소장을 욕하곤 했는데 이를 중국 탄광부들이 고자질 하자 홧김에 중국인들과 싸우다가 바른쪽 눈을 못보게 된 것이다.

그때 그에게 접근해 온 여성이 있었으니 예전부터 그를 흠모해 왔던 김계향이라는 여성이었다. 김계향은 빈털털이에다 애꾸눈의 김영근을 포근히 받아들여 동거생활을 시작함으로써 실질적인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2년여의 동거생활에 염증을 느꼈던지, 아니면 공산학정이 싫었던지 그는 단신 월남한 뒤 김용식의 주선으로 조선전업 축구단의 주무로 취직했다.

현역시절 화려했던 그가 후배선수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주무라는 직업에 만족했을리 없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서울 태능입구에서 상계동 쪽으로 가다보니 김영근이 살고 있다는 다 찌그러진 판잣집이 나오는데 거기에 죽은 시신이 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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