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체육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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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민 (1905-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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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54 체육인, 야구선수
경상북도 출신

학력
연희전문학교 졸업
조선의 축구대표선수로 일본, 중국 상하이 등지에 원정하고, 뒤에 야구로 전향하여 2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홈런을 날려 타격왕으로 이름을 날렸다.
광복 후 조선야구협회 초대이사장에 선임
48년 런던올림픽대회 조사연구원으로 파견
한국야구협회 부회장, 아시아야구연맹 한국대표 등 역임.


이영민 생애

 1905년 12월 1일 경북 출생인 이영민은 대구 계성중학에 다니다 1924년에 서울 배재고보로 올라와 야구선수로는 이 땅에서 '스카우트 제1호'를 기록했다. 그 시절에는 요즘처럼 돈의 유혹에 끌려다닌 배금주의에 젖은 스카우트란 생각지도 못했으며 다만 "말은 낳으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처럼 큰물ㅇ서 자라기를 원하는 대도시 지향적인 동경심에서 서울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영민이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국내 야구의 '제1호 기록'은 뭐니뭐니해도 경성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제1호 홈런을 때린 것이다. 배재고보를 졸업, 연희전문으로 진학한 이영민은 1928년 6월 8일 경성운동장에서 펼쳐진 제2회 연희전문-경성의학전문(현 서울대 의대) 정기전에서 1회말 3번 타자로 나서 구장개장 이래 최초의 홈런을 기록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처음으로 타구가 외야를 넘어가는 홈런을 기록했던 것이다. 그 전에는 홈런이라 해봤자 외야수들이 공을 따라다니는 사이 빠른 발로 홈런이라 해봤자 외야수들이 공을 따라다니는 사이 빠른 발로 홈까지 뛰어드는 이른 바 러닝홈런 뿐이었는데 이영민이 마침내 포플러나무들이 키재기를 하고 있는 외야 뒤쪽으로 타구를 넘겨 숲속에 빠뜨렸으니 1926년 개장한 이래 3년만에 처음 보는 '경사'였다.

연희전문을 졸업하고 식산은행에 입단했을 때의 일이다.
식산은행은 게이오대와 이 구장에서 친선경기를 가졌는데 이영민은 일본에서 가장 공이 빠른 투수의 하나라고 자부하던 미야다케의 공을 힘껏 두들겨 펜스는 물론 키 큰 나무까지 훌쩍 넘어가는 초대형 장외홈런을 기록했따. 그 시절에는 야구용구가 워낙 귀했고 공은 가히 '보물급'이어서 파울지역으로 날아간 타구는 물론 홈런타구까지도 회수해서 다시사용하던 시절이었는데 이영민은 그만 그 보물을 사라지게 만든 것이었다.(그 당시 공 한두 개로 한 게임을 완전히 치러냈다.)

이영민은 전경성의 일원으로 일본에서 벌어지는 흑사자기 쟁탈 전일본 도시대항 야구 우승대회에 자주 출전했다. 거기에 출전해서도 엄장한 체구에다 가공할 힘을 발휘하자 일본 야구계도 "조선에 명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대회에서는 조선 뿐 아니라 만주, 대만 등 일제의 지배를 받는 지역에서 제각기 예선전을 거쳐 일본의 본선대회에 팀을 파견하고 있었다.

1932년 제6회 대회 조선예선에는 전경성, 평양철도, 대전철도, 청진철도, 전대구 등 5개팀이 출전, 토너먼트 방식으로 출전권을 가린 결과 결국 전경성이 청진철도를 7-4로 물리치고 대표로 나섰다.
이번 전경성에는 이영민이 외야수로, 함용화는 1루수 겸 포수로 처음 출전했다. 전경성은 16개 팀이 출전한 본선 1회전에서 전히로시마를 12-6으로 꺾고 무난히 2회전에 올랐으나 대북교통단에게 전년도에 이어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스코어만 5-4로 좁혀졌을 뿐이었다. 대북교통단 역시 중국인은 한명도 끼여있지 않은 일본 선수단이었다.
이영민은 1933년의 제7회 대회에서도 본선지출권을 따내 전경성의 3번타자 겸 좌익수로 활약했다. 그는 필요할 때면 내야수도 맡고 마운드에서 서고 마스크도 쓰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였다.
전경성은 가와사키 콜롬비아와의 1회전을 7-6으로 어렵게 따돌렸고 2회전에서는 나고야철도를 6-0으로 제압, 4강에 진출했다. 전경성은 여기서도 야하다 제철을 10-9로 간신히 제치고 마침내 결승에 올랐다. 상대팀은 대련실업단을 8-6으로 누르고 올라온 동경구락부 또다시 숙적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이다.
전경성은 결승전에서 8회까지만 해도 5-2로 앞서 감격으리 첫 우승을 눈앞에 두었으나 9회말 3점을 뺏겨 연장전으로 몰리고 말았다. 이영민은 이날 결승전에서 투수와 좌익수로 번갈아 뛰면서 6타수 3안타로 맹활약했으나 역전패로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1935년 제9회 대회에 백기주를 1번타자 겸 외야수로 내세운 평양철도는 기필코 본선출전권을 따내겠다고 "타도 전경성을 외치고 나섰으나 이번에도 이영민이 투수 겸 외야수로 중심에 버티고 선 전경성에게 4-2로 분패, 본선 진출이 좌절됐다.
전경성은 본선 1회전에서 천리산철도구락부를 6-3으로 무난히 따돌리고 8강전에서 동경구락부와 격돌, 2년전 결승에서 진 빚을 갚으려 했으나 이번도 공교롭게 똑같은 스코어(6-5)로 패배하고 말았다. 이날도 이영민은 3번타자로 등장, 5타수 3안타의 맹타를 기록하면서 분전했으나 초반 6실점의 부담이 워낙 커서 중반이후 맹추격에도 불구하고 끝내 1점차로 눈물을 흘렸다.
1936년 제10회 대회 본선진출권을 놓고 5개팀이 겨룬 결과 또다시 전경성-평양실업의 최종 결전이 남게 됐다. 이번에는 박현명을 마운드에 올린 평양실업과 이영민이 투수로 나선 전경성이 7회까지 팽팽하게 맞서 0의 행진을 벌였으나 8,9회초 일시에 균형을 무너뜨린 전경성이 8-0으로 대승, 출전권을 양보하지 않았다. 그러나 8월 2일 본선 이틀째 1회전에서 전경성은 가와사키 콜럼비앙게 8-2로 패배, 탈락하고 말았다.

1932년부터 전일본도시대항대회에 출전하며 일본야구계로부터 주목받던 이영민에게 운명을 바꿀 뻔한 일생일대의 전기가 모습을 숨기고 있었다. 1934년 12월 요미우리신문사가 프로야구단을 창단하기 위한 사전작업을 '대일본 동경야구 구락부(약칭 동경구락부)'를 조직할 무렵의 일이다.
요미우리신문사는 야구붐 조성을 위해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리그, 찰리 게링거, 지미 팍스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함돼 있는 미국 올스타팀을 초청, 일본 순회경기를 주선했는데 이에 대항할 '전일본'팀을 구성하면서 이영민을 그 일원으로 뽑은 것이었다.
만능선수인 이영민의 활약은 조선민족 전체의 각별한 기대를 모았고 이영민 자신도 본토야구의 대선수들과 당당히 겨루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민족차별이 심한 대일본팀 감독은 이영민을 겨우 두차례 대주자로 내보냈을 뿐 장쾌한 타격솜씨를 발휘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이영민으로서는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이영민과 같은 유니폼을 입은 대일본팀에는 미즈하라 시게루, 사와무라 에이지 등 일본 프로야구의 초석을 세운 전설적인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유니폼을 입고나면 투수로서, 포수로서, 중견수로서 그야말로 만능의 재능을 발휘하던 이영민은 8.15해당을 맞고나서 만 40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전배재' 소속으로 동아일보사 주최 4구락부대회에 출전, 어린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었다. 그러나 이영민은 한낱 선수로서 야구인의 길을 마치기에는 시대적 상황이 그를 가만히 내 버려두지 않았다. 해방 후 조선야구협회 창립에서부터 야구행정을 주도해온 이영민은 두 살 연하인 자유신무사 이정순 편집국장과 콤비를 이뤄 각종 야구대회를 창설하는데 앞장섰다. 그리고 1946년 8월 제1회 청룡기쟁탈 중등학고 야구선수권대회를 개최할 때는 경비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공을 저당잡혀 돈을 차용하는 희한한 에피소드를 남겼다.

임시집행부 형식으로 돼 있던 조선야구협회가 정식으로 발족한 것은 1946년 3월 18일이었다.  이영민과 이정순의 주도면밀한 계획아래 63명의 야구인이 식산은행 구락부회의실에 모여 발기총회를 열었다. 그 결과 서상국이 초대 회장으로 추대됐고 부회장에는 이영민과 함용화, 이사에 이순재, 김영석, 손희준, 최중을, 김태호, 민용규, 이경구, 김정식 등 8명이 선출됐다. 이밖에 평의원회는 이원용등 15명으로 구성하고 지도부와 심판부도 설치했다. 뒤이어 사업심의에 들어가 도시대항야구대회, 조미친선야구대회, 대학전문야구대회 및 중등야구대회 등 4개 대회를 자유신문사가 주최하도록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영민은 이화여전에서 정구선수로 이름을 날린 이보패와 결혼했다. 이보패는 서울 서대문의 경교장 옆에 대지가 수천평이나 되는 대궐같은 집에서 사는 '공주님'이었따. 그녀의 부친 이지성은 부동산과 현금을 많이 갖고 있는 알부자였따. 구한말에 하와이로 가서 인삼 등을 취급하는 무역업을 해 떼돈을 벌어 귀국한 장안이 떠들썩했던 갑부였다.
이영민과 이보패의 결혼은 이를테면 최고로 인기있는 스포츠 커플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이영민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단란한 편은 아니었다. 이영민이 '영웅호걸로서의 속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영민은 1954년 8월 12일 야구인들이 쉬쉬할 정도로 불행한 한여름밤의 참변으로 최후를 맞았다. 일설에는 아들이 쏜 흉탄에 쓰러졌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 중구 필동의 소실 집에 머물고 있던 중 문제아인 아들이 친구들과 공모, 집을 털려다 들키자 아들의 친구가 면식범으로 붙잡힐 것을 우려한 나머지 가슴에 품었던 총을 빼들었다는 것이 정설로 돼 있다.
대한야구협회는 이영민이 타계한 후 1957년말 이사회 결의를 거쳐 그를 추모하는 상을 마련, 매년 각종 국내대회에서 최고타율을 기록한 고교선수에게 '
이영민 타격상'을 수여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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