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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1915~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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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경상북도 의성 출생

학력
의성보통학교졸
1935년 배재고등보통학교졸
일본 메이지대학 전문부 상과 졸업

김종석의 생애
김종석대구에서 안동으로 통하는 국도가 의성읍을 남북으로 가르며 관통한다. 의성읍의 북구에 후죽동이란 동네가 있는데 그 후죽동 575번지에 김중필이라는 천 석을 넘는 대지주가 살고 있었다. 그 김중필에게 한국 레슬링의 시조 김종석이 종손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남부럼 없이 자란 김종석은 여덟 살의 학령에 도달하자 의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보통학교 때의 김종석은 훗날 한국 레슬링의 리더가 될 만큼의 튼튼한 몸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김종석은 의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상경하여 배재고등보틍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일찍이 축구, 야구, 농구, 럭비 등의 단체경기를 장기로 하는 스포츠 명문이기도 하였다. 김종석도 입학했을 땐 축구부에 들어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자신이 운동에 소질이 있다고 여기면서도 축구에 발을 대지 못하고 끝내는 유도와 씨름 선수가 되었다.
체급경기 선수가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이 오른쪽 눈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배제고보에 들어가서 2학년이 되었을 때에는 완전히 실명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명한 눈엔 의안을 끼고 다녔는데 그렇게 불편해지면서 김종석은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는 할래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오른쪽에서 오는 공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어 남보다 한순간 늦게 공을 잡게 되는 까닭에, 이래서는 축구뿐 아니라 농구도 야구도 할 수 없다고 여겨 별도리 없이 상대방을 잡고 자기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씨름과 유도에 정진했던 것이다.
배재고보 2학년 때부터 씨름과 유도에 정진한 결과, 졸업할 무렵에는 유도 2단에 이르는 학생유도의 고단자가 되었으며 배재의 씨름과 유도의 대외경기 때엔 김종석은 학교를 대표하여 출전할 만큼 우수한 기량을 지닌 운동선수가 되어 있었다.
1935년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메이지대학 전문부 상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공하였던 유도경기의 기량을 더 닦아보겠다고 유도부를 기웃거렸더니 일본은 유도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나라인지라 유도부에는 고단자들이 우글거리고 있어 그 틈에 끼어서는 자기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고 기량을 딱기도 어렵다고 여겨 유도장 언저리에서 들리는 쿵쾅 소리를 듣고 가보았더니 그곳은 레슬링 도장이었으며 부원들이 매트위에서 뒹굴고 있다. 이 레슬링이야 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경기라고 여긴 김종석은 레슬링부에 바로 입부하여 일본인 선배부원들의 환영을 받으며 메이지대학 레슬링부 부원이 되었다.
1936년 센슈대학에 레슬링부가 생겨서 도쿄에 레슬링부를 거느린 대학은 와세다, 게이오, 메이지 4대학 리그전이 봄가을로 열렸지만 레슬링은 일본에선 아직 널리 보급된 경기는 아니었다. 따라서 민족적 차별이 없는 가운데 선배들의 지도를 받아 열심히 훈련하는 것은 김종석의 즐거움이었다.
김종석은 힘이 셀뿐더러 몸이 빠르고 연습량도 남달리 많았으며 성실하여 기술을 빠르게 익혔다. 강의 시간이 끝나면 학교 구내에 있는 레슬링 도장의 큰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비추어가며 웨이트트레이닝에 힘쓴 다음 연습을 하여 기술은 나날이 늘어갔다.
코치인 미즈다니가 자유형 선수였기 때문에 김종석도 자유형 선수가 되었고 그이 감화를 받아 그를 이어 1937년에 들어오는 김옥규, 그에 이은 황병관, 김석영, 곽동윤 등 모두가 자유형 선수가 되었다.
1936년은 레슬러 김종석이 크게 비약한 해다.
베를린 올림픽이 열렸던 그 해 12월 5일, 메이지대학 체육관에서 제3회 전일본 레슬링선수권대회가 열렸을 때 라이트급(62kg)결승전에서 가자마와 김종석이 대결하여 베를린 올림픽대회에서 5위를 한 가자마와 거의 대등한 경기를 펼쳤고 가자마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즉 김종석은 1936년에 이미 일본 레슬링의 라이트급 제2인자가 된 것이다.
1937년 11월 제4회 전일본 레슬링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라이트급의 김종석을 대항할 만한 선수는 일본에 없었다. 이미 가자마는 체급을 웰터급으로 올렸기 때문에 김종석은 라이트급의 제1인자가 되어 우승했던 것이다.
1937년 12월 일본 올림픽 대표팀이 필리핀에 원정하였다. 1940년 일본은 도쿄에서 제12회 올림픽을 개최할 예정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일본의 레슬링은 좋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활발히 외국으로 전지훈련할 계획을 세웠다.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일본 레슬링은 대표팀을 구성하여 필리핀에 원정을 하였던 것이다. 이 때 김종석은 라이트급 대표로 뽑혔다. 일본은 필리핀 대표와 3차례 대전하여 모두 이겼는데 특히 김종석은 폴로 상대방 선수들을 모두 눌러 인솔자인 핫타 감독의 칭찬을 받았고 고국인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들을 김종석의 활약을 전하면서 동양의 장사가 태어났다고 보도하였다.
김옥규가 레슬링에 처음 입문했을 때 일본인 선수들은 김종석과 대전하는 것을 거북하게 여기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김종석의 실명한 오른쪽 눈에는 의안이 박혀있었기 때문에 눈알이 움직이지 않아 상대방이 그의 눈을 보아서는 어떤 수를 쓰려고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어 당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김종석이 너무 강했기 때문에 대학리그전 때, 메이지와 우승을 다투던 와세다대학 응원단은 제 팀 선수들이 여지없이 물러서는 데에 분을 느껴 닌니쿠(마늘의 일본말: 한국인에게서 마늘냄새가 난다는 것을 멸시하여 하는말)라고 야유를 하였단다. 그러면 김종석은 더더욱 화를 내고 분발하며 상대방을 짓눌렀다고 한다.
이렇게 김종석이 강해지면서 메이지대학 레슬링부 안에서 그의 위치는 올라섰고 굳어져 갔다. 1939년 3년 과정의 메이지대학 상학부 2학년생이 되었을 때 김종석은 일본인을 제치고 레슬링부의 주장으로 뽑혔다.
일본은 1940년 도쿄 올림픽을 유치하였으나 중·일전쟁을 일으켜 국력이 소모되면서 이를 반환하였는데, 그에 앞선 1938년에는 올림픽을 대비한 장기합숙훈련을 했다.
그 때의 일본 대표 12명 속에 김종석이 뽑혀 메이지대학에 서 멀지 않은 일본청년관에서 훈련을 하였다. 이 무렵에는 이미 페더급의 곽동윤, 웰터급의 김옥규 같은 쟁쟁한 김종석의 후배들이 메이지대학 레슬링부에 들어와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8년 5월 필리핀이 일본에 원정을 와서 네 번 대전하엿는데 그 가운데 도쿄의 히비야 음악당에서 있었던 대전에서 라이트급의 대표였던 김종석은 필리핀의 베르나베를 목다리 감감고 굴리기라는 고난도의 기술로 간단히 폴로 이겼다.
그 해 6월에는 4대학 리그전이 여렸는데 김종석을 비롯하여 곽동윤, 김옥규 등 한국선숟ㄹ의 활약으로 메이지대학이 우승을 하였다. 또 7월에는 미국 팀을 초청하여 미국과 일본 팀 사이에 대항전이 펼쳐졌을 때에도 김종석은 크게 활약했다. 특히 제4차전은 메이지대학 단일 팀과 미국 팀과의 대전이었다. 그 때 페더급의 곽동윤은 미국의 리드란 선수를 롤링폴로 이겼고 김종석도 이겨서 메이지대학이 3대2로 미국 팀을 물리쳐 레슬링에 강한 메이지대학의 체면을 세웠다.

한국 YMCA에서 강습회 개최
1938년 여름 우리나라에 레슬링이 본격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김종석과 그의 후배인 김옥규가 여름방학에 서울에 들려 일주일 동안 YMCA에서 레슬링 강습회를 연 것이다.
당시 종로2가에 있ㄴ는 YMCA의 체육부 간사는 장권이었다. 그는 유도 고단자였지만 YMCA에 몸담고 있었던 만큼 각종 스포츠에 능통했다. 장권은 일본의 대학에서 한국 선수들이 레슬링을 주름잡고 있는 것에 착안, 이 경기를 한국에 퍼뜨리기 위해 김종석과 김옥규에게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레슬링 강습회를 열어달라고 부탁하였다.
2주일간의 강습회에 30명의 희망자가 모여 하루 3시간씩 강력한 트레이닝을 바탕으로 한 강습회를 실시했더니 남에게 구속받지 않고 지내오던 그들인지라 반항을 하고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 결과 태어난 수제자가 조순동이었다. 강습이 끝난 후 장권은 조순동에게 YMCA의 레슬링부를 창설하도록 맡겼다.

메이지의 황금기
1940년 5월 일본 간토 학생레슬링대회가 도쿄의 히비야 음악당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일본의 5개 대학인 메이지, 와세다, 게이오, 센슈 및 릿교대학이 출전하여 5대학 리그전으로 펼쳐졌다. 김종석이 주장으로 있던 메이지대학은 한국선수들이 주류를 이뤄 그들이 얼마나 분전하느냐에 따라서 우승의 향방이 갈리게 되어있었다. 따러서 일본인들은 주장과 선수들 대부분이 한국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과연 메이지가 우승할 수 있겠는가 주목하였다.김종석은 선수들에게 경기에 앞서 한국인의 뚜렸한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해 승리를 노려 최선을 다해 싸워달라고 부탁하였다. 김종석의 뜻은 선수들 사이에 스며들어 모두 분투하여 결국 메이지대학이 종합우승을 거두었다.
김종석은 41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의 중국 지린성 신경에 세워진 만주영화협회에 취직하였다. 김종석은 8.15 후 귀국하여 교육계에 투신, 고향인 의성 주변의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1980년에 정년퇴직 하였다. 그는 교육계에 헌신하는 한편으로 경상북도의 지역 스포츠활동에 전력하여 의성군 체육회 부회장, 경상북고 레슬링협회 부회장을 지내면서 스포츠 보급에 힘을 쓰다가 1995년 경상북도 의성의 후죽동 자택에서 80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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