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체육인물

 7월로

남수일

 9월로

 메인

남수일의 생애
남수일남수일 1940년 1월 아사히체육상 수상-세계신기록 역도에서 세계기록을 세우게 된 비결이 무엇이낙 묻는 일본인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바벨을 들어올릴 때 입을 벌려 하-하며 숨을 내어 뿜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역도 대표 서울동소문 밖 삼선동 태생 어릴때부터 스포츠에 뛰어난 소질을 발휘 달리기, 체조, 축구, 수영 등 모두에 능해서 어린이들끼리의 대항전에 나가면 으레 승리를 차지했다. 1930년 경성전기 주식회사에 역도 특기로 입사, 차고 한구석에 마련된 체육관에서 주로 연습을 했으며 그에게는 월봉 45원 외에 운동연습수당 40원이 지급됐다. 20세를 약간 넘겨 조선굴지의 대기업의 초년사원이면서 한달에 85원이란 큰돈을 받는 여유 있는 고급봉급쟁이였다. 경전에 다닐 무렵 서울의 쌀값은 한가마니 약 7원이었다. 그런 물가로 견주어 월수입 85원이라면 남수일은 당시의 서민들의 경제사정으로 미루어 엄청난 수입을 올린 것이다. 혜택받은 환경 속에서 마음껏 운동하다 세계신기록을 세워 아사히 체육상도 차지하였고 업적이 워낙 뛰어났기에 일본 역도계를 곯려 주어도 일본인들은 아무 소리 못하고 남수일을 우러러 보았다. 47년 필라델피아 세계선수권대회 출전 48년 런던올림픽 역도대표 출전 4위 페더급인 남수일의 공인기록 총계는 335kg이엇다. 전성기엔 그 기록을 비공인으로 350kg까지 끌어올린 적이 있었다. 그렇게까지는 들지 않더라도 335kg만 들어 올렸어도 런던에서 금메달을 땄을 것이다. 그러나 살리실산용액사건으로 몸에 변고가 생기면서 컨디션을 회복치 못하여 335kg보다 훨신 못한 307.5kg밖엔 들지 못해 4위가 되고 말았다. 6.25의 비극 한국동란이 터지면서 패난생활을 하게되자 선수생활은 중단되었는데 이때에 역도에 이해를 가진 소장정객 이철승이 해군 출신의 손원일국방장관을 찾아 역도선수들의 후원을 부탁하였다. 그가 보살펴줄 것을 부탁한 역도선수들은 남수일, 김성집, 최항기(페더급) 등 4명이었으며 손제독이 그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임에 따라 남수일 등은 진해의 해군사관학교에 문관으로 채용되어 피난생활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훈련에 정진할 수 있었다. 52년 헬싱키올림픽 역도대표 출전 - 치통이 도지면서 어금니를 빼자 힘을 쓰지 못하여 경기에 실패하고 올림픽을 제패히 보이겠다던 그의 웅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1939년 페더급 세게신기록 수립 국제 역도연맹 공인 헬싱키올림픽선수단 총감독인 이상백 박사는 명랑하고 낙천적인 남수일의 사람됨됨이를 좋아하였다. 사기를 당한 날 오후, 그를 만나자 마침 오페라표가 생겼으니 구경하러 가자고 권했다. 유명한 고대로마 영화으 유적 칼라칼라 욕장터에 마련된 야외무대에서 펼쳐지는 오페라는 평생 한 번은 봐야 이야기거리로 삼을 만하다며 보아두라고 권했다. 존경하는 어른 의견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를 따라나서 공연장에 이르렀더니 그날 연주되는 것은 그 유명한 '아이다'였고 세계유수의 가수들이 출연하여 미성을 겨루는 경연장이어서 과연 한번 보아둘 만한 구경거리였다. 그러나 평생 운동만을 해온 남수일에게 이탈리아말로 엮어진 가극이 재미있을리 만무했다. 헬싱키를 출발한 이래 관광, 쇼핑으로 지쳐있는 몸이엇다. 지정좌석에 앉아 '아이다'를 노력해서 듣는다고 하다가 그만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어지간히 곤했던지 정신없이 코를 골고 있는데 옆구리를 누군가가 쿡쿡 찌른다. 귀찮게구네하고 눈을 떠보았더니 귀부인차림의 노숙녀가 정신차려 들으라는 듯 남수일을 노려본다. 그 순간 남수일은 이것 야단났다, 큰 실수를 저질렀구나 싶어 자신의 선수단 단복 왼쪽 가슴에 달린 태극마크를 손으로 가리고 "아이 엠 저패니스"라며 변명하였다. 자신은 한국인 아닌 일본인이라고 즉석에서 둘러댄 것이다. 1972년 5월 62세로 별세

 

bar_s_1.gif

HOME | 환영사 | 방명록 | 자료실
Copyright(c)1999 -2007 SPOSEUM Co.webmaste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