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체육 인물 top04.gif

2월

김영기 (金永基 1936~  )

4월


원로 농구인. 1962년 제4회 자카르타 아시아 경기대회와 1963년 제2회 아시아 농구 선수권대회에 우리 나라 대표로 참가했다. 우리 나라 농구의 초창기였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농구를 인기 종목으로 끌어올렸다. 키가 1m 76cm로 농구 선수로서는 비교적 작은 편이었지만 드리블, 드라이브인, 슛이 정확했고 경기 흐름을 읽는 능력도 뛰어났다.
서울 출신으로 배재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1997년 프로로 출범한 한국농구연맹(KBL)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pin01b.gif 출생지 :  서울
  
 pin01b.gif 학력사항
  
  - 1955 서울 배재고 졸업
  - 1959 고려대 법대 법학과 졸업
 
 pin01b.gif 경력사항
  
 1960   농업은행 입행
 1963 - 1974 중소기업은행 대리, 과장
 1971   농구협회 이사
 1974 - 1976 중소기업은행 차장, 지점장
 1976 - 1982 신용보증기금 총무, 기획, 업무개발부장
 1982   신용보증기금 이사
 1982   대한체육회 이사, KOC 부위원장, 대한스포츠위원장
 1983 - 1989 대한체육회 부회장
 1984   LA올림픽 한국선수단 총감독
 1985   대한체육회 선수 자격심의위원장
 1985   신용보증기금 상임 감사
 1985   농구협회 부회장
 1988   신용보증기금 전무이사
 1991   신보창업투자 사장   한국농구연맹(KBL) 전무이사
 1999.11 - 현 한국농구연맹(KBL)초대 부총재
 
 pin01b.gif 상훈사항
  
  대통령표창
  국민포장
  체육훈장 맹호장
 

대표팀의 스타플레이에서 우승제조감독으로, 다시 금융업체의 성공적인 경영인을 거쳐 한국프로농구 산파역을 맡은 보기드문 엘리트 체육인이다.
 김역기는 1936년 1월 7일 서울에서 태어나 거의 반세기를 농구와 함께 하면서 스타의 길을 걸어왔다. 배재고등학교 시절 이미 전국 최고의 에이스슈터로 자리 잡았으며 고려대학교에 진학해서는 기량이 더욱 원숙해져 바로 대표팀의 확실한 주득점원이 되었다.
학업성적도 탁월하여 대학에서는 법학을 했으며 훗날 은행원이 된 뒤로는 총무부장, 심사부장 등 요직을 맡을 만큼 실력을 인정 받았다. 무엇보다 두뇌가 명석하고 이론에 밝다는 것이 농구인의 공통된 평이다.
 대학을 마치고 공군에 입대하자 육군, 해병대팀이 밀리기 시작했으며 개인상은 거의 김영기의 몫이었다. 그의 명성은 이미 아시아권에 널리 퍼져 대만, 필리핀 등에서는 항상 VIP대접을 받곤 했다.
 한국 남자농구가 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최강 필리핀을 꺾고 대망의 첫우승을 거두었을 때도 김영기 감독의 뛰어난 전략과 용병술이 돋보였다. 그 이듬해 방콕아시아경기에서도 그가 이끄는 한국 남자팀은 정상을 굳게 지켜 황금 진용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60년 농업은행에서 시작된 그의 직장생활은 63년 중소기업은행 과장, 74년 동은행 차장, 76년 지점장, 77년 신용보증기금으로 옮겨 기획부장, 심사1부장, 업무개발부장을 거쳐 82년 전무이사, 91년 창업투자 대표이사에 이르렀다.
 선수, 감독으로, 그리고 금융인으로 순탄한 코스를 걸어온 김영기는 괄목할 만한 경기실적과 리더십을 발판으로 82년 대한올림픽위원회 부위원장, 83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대학스포츠위원회 위원장, 84년 LA올림픽 한국선수단 총감독, 88년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에 올랐다.
 90년대 후반 이후로는 프로농구연맹(KBL) 전무이사로 프로농구를 정착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여 이 역시 성공작으로 만들었다.
 포상으로는 국민포장, 체육훈장(맹호장), 재무장관표창, 문교장관 표창, 대통령 표창이 있으며 <갈채와의 밀어>라는 저서가 있다.

 

bar_s_1.gif

HOME | 환영사 | 방명록 | 자료실
Copyright(c)1999 -2007 SPOSEUM Co.webmaster for more inform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