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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장  훈(張勳 1940~  )

5월


40년 6월 19일 일본 히로시마 태생. 체육인. 재일 동포 야구 선수. 일본 히로시마에서 태어났다. 나니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1959년 도에이(東映)프로야구단에 입단하여 그해의 신인왕이 되었다. 오른손잡이였으나, 오른손 손가락이 부러지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이후, 왼손으로 끊임없이 연습하여 일본 야구계의 최고의 왼손잡이 타자가 되었다. 60년 베스트 10에 선발되었으며, 62년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70년에는 타율이 3할 8푼 3리(0.383)로, 일본 프로야구 최고 타율을 기록했다. 75년 400호 홈런, 80년에 일본 프로야구 개인 통산 첫 3,000개 안타를 기록했다. 81년 23년간의 프로 야구 선수 생활에서 은퇴할 때까지 일곱번의 수위 타자가 되었다. 80년 대한 민국 정부로부터 체육 훈장 맹호장을 받았으며, 82년 이후 한국 프로 야구 위원회 총재 특별 보좌관으로 있다.

 신문기사 내용

[프로야구] "전설의 강타자" 장훈, 날카로운 현장분석
스포츠조선이 제3회 한일슈퍼게임을 맞아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적인 강타자' 장 훈씨의 관전평을 독점 게재합니다. 본지의 일본 제휴사인 스포츠닛폰에 야구 평론을 쓰고 있는 장 훈씨는 6일 나고야돔 개막전과 최종전인 10일 도쿄돔 4차전을 관전한뒤 날카로운 시각으로 한국과 일본 야구를 비교 분석할 예정입니다. 지난 91년 제1회 대회와 95년 제2회 대회 때도 본지에 독점 관전평을 실어 야구 팬들의 안목을 넓혀 주었던 것처럼 올해도 무게 있는 글로 현장 분위기를 전할 것입니다. 장 훈씨는 도에이→요미우리→롯데를 거치면서 23년 동안 통산 최다안타(3085개)와 3할대 타율 16회, 타격왕 7회의 대기록을 남기며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등 재일동포들의 자긍심을 드높인 자랑스런 야구인입니다.


[장훈이본 한국야구] "46년 나이차 아직은~"

두경기를 통해 본 한국야구의 수준은 확실히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일본야구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선수들이 상체의 근력 트레이닝을 철저히 실시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투수와 타자 모두 상체의 힘에 지나치게 의존할 뿐 하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타자의 경우 중심 이동에 문제를 드러냈다. 준비자세에서 임팩트할 때까지 `하나 둘 셋'으로 타이밍을 맞추고 있는데 `하나 둘∼ 셋'의 `둘∼'의 기다리는 과정이 없다. 짧은 순간의 호흡 고르기가 없기 때문에 공끝의 변화가 많은 일본투수들의 피칭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대로 이런 작은 차이에 대처한 타자는 6일 1차전 7회말 교체 3루수로 나가 9회초 다카쓰와 7구까지 실랑이를 벌이다 좌익수플라이로 물러난 김한수(삼성) 뿐이었다. 54개의 홈런을 터뜨린 이승엽(삼성)은 일본의 4번 마쓰이(요미우리)와 마찬가지로 오른쪽 다리를 `투스텝'으로 움직이며 타이밍을 잡는 타격자세다. 작은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하체를 적절히 활용하지 못해 타구의 힘이 떨어졌다. 1차전에서 두차례 외야플라이가 펜스 앞에서 더 뻗어가지 못한 것이 이를 입증하는 장면이었다. 투수들도 상체훈련에 치중하다보니 러닝과 피칭이 부족해 정교한 제구력이 떨어졌다. 잘못 알고 있는 `메이저리그 방식'이 가져온 결과였다. 미국 투수들도 마이너리그 시절 많은 러닝과 피칭으로 하체를 단련시켜 놓았다. 결국 상체만 메이저리그 흉내를 내며 실효성 없는 훈련을 한 셈이다. 동양인과 서양인은 근본적으로 파워에 차이가 있는 만큼 많은 훈련과 선진기술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 한국야구의 잘못된 현상은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 무조건 미국이나 일본을 따라하지 말고 적절한 기술 지도법을 찾고, 활발하게 교류하면 한국야구는 반드시 가까운 장래에 일본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이다.  

타격왕이 되기까지
일본에서 프로야구생활 23년. 나는 3천85개의 안타와 5백 4개의 홈런을 때렸다. 수위타자를 7번이나 차지했다.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기록이라 자부한다. 뿐만 아니라 MVP에도 뽑혔고 우승의 절정감도 맛보았다.
나는 왼손차자이지만 타고날 때는 오른손잡이 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로 바뀐 이유는 우연한 사고 때문이다. 나의 오른손은 새끼손가락과 약지가 붙어 있다.
힘든 야구를 나는 왜 23년간이나 계속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맛있는 것 많이 먹고 좋은 생활을 하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 때문이었다.
나는 입단 첫해 신인왕을 따냈다. 나는 3할 미만의 타율(.275)과 한국인이라는 두 가지 점 때문에 염려를 했으나 기자단 투표서 141표중 111표를 얻어 압도적인 표차로 신인왕에 선정됐다. 야구선수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 히로시마에 함께 살자는 어머니의 간청을 뿌리치고 오사카의 나니와상고를 찾아갔던 내가 스스로도 대견했다.
NHK-TV에서 내 오른손을 촬영하고 싶다는 요청이 왔을 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어머니에게도 보여 주지 않기로 했는데 매스컴을 통해 공개할 수는 없었다. 단 한 사람 가장 존경하는 가와카미 씨에게만은 보여 준 적이 있다. 그는 "엇"하며 놀라더니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두 눈에 물기를 내비치며 "이 손으로 어떻게..."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입단 4년째 타율 3할3푼3리. 홈런 31개로 MVP에 뽑힌 나는 기고 만장했다. 그때가 21살. 무서울 게 없을 만했다.

지난 90년 7월 24일 요코하마 야구장. 나는 올스타전 경기에 앞서 수많은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다.
지금까지 타구방향, 구질, 스피드 등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프로 첫안타와 첫홈런이 대표적인 경우다.
59년 5월 10일 그해 프로야구 개막전, 나는 신인으로 6번 좌익수로 기용돼 첫타석서 요네다투수에게 삼구삼진을 당했다. 그날 밤 밤새 스윙을 계속했던 기억. 다음날 프로야구 통산 두 번째 타석서 아키모토 투수로부터 좌중간 2루타를 뽑아냈다. 바깥쪽 스크루볼(속칭 슈트)이었는데 공의 변화, 배트에 맞는 순간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음 타석서 나는 이시이 투수의 커브를 통타. 우측 담장을 넘기는 첫 홈런을 터트렸다. 아키모토의 스크루볼, 이시이의 커브. 그 변화와 배트에 맞는 순간의 감촉이 어제 일처럼 뚜렷이 느껴진다.

도에이 선수시절 숙소에는 젊은 선수들이 1층, 주전들은 2층을 사용했다. 나는 20세에 불과헸으나 2층의 방 하나를 부여받았다. 내 방에는 여러 개의 못을 박아 배트를 수평으로 걸어 두었다. 배트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배트는 전장에 나서는 무사의 칼과 같다.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프로3년째 나는 시즌초부터 펄펄날았다. 5월 7일 긴테쓰전서 첫 사이클링히트를 기록했다. 첫타석서 선제2점 홈런을 때린 후 우중간 3루타, 중전안타,좌중간 2루타를 잇달아 작렬시켰다. 그전 해까지만 해도 쩔쩔맸던 난카이의 수기우라를 상대로 프로 첫만루 홈런을 뽑아낸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것도 2사만루에서.

미즈하라 감독은 타격에 관한한 나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니시무라 수석코치만 "타격시 배트 끝이 조금 앞으로 나온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곤 했다. 나는 컨디션이 좋을 때는 배트 끝이 원을 그리며 타이밍을 맞추는데 나쁠 때는 배트 끝이 앞으로 나오는 결점을 지녔다.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보기 힘든 미세한 변화를 유능한 코치들은 끈질긴 관찰끝에 선수에게 지적해 준다.

79시즌을 끝냈을 때 나는 통산 2천9백61안타를 기록 중이었다. 이미 노무라 감독이 보유한 최다안타 기록을 깬 상태이나 일본프로야구사상 전인미답의 통산 3천안타에 고작 39타를 남겨놓고 있었다.
3천안타는 내 야구인생 전부를 건 목표로 1년에 1백50안타씩 20년을 때려야 가능한 숫자다. 나는 불가능에 가까운 그 목표의 한 발 앞에서 있었고 거인유니폼을 입은 채 그것을 달성하고 싶었다. 39안타면 스타팅멤버가 아닌 대타출장으로도 가능한 숫자였다.
 
5월 28일 한큐전. 상대투수는 야마구치였다. 퍼시픽리그서 손가락 꼽히는 강속구투수였다. 나는 경기 전 야마구치가 나를 상대로 어떤 공으로 승부해 올까를 생각했다. 그는 스피드에 자신이 있는 투수다. 39살의 나이에 어설픈 변화구를 던지지는 않을 것이다. 투수들은 누구나 기록의 제물이 되기 싫어한다. 당연히 그는 빠른 공을 던져 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결론은 간단하다. 빠른 공을 기다리면 된다. 상대가 무엇을 던질 것인가를 알고 타석에 들어서면 승부는 이미 끝난 상태다.  그날따라 롯데타선이 폭발, 6회말 네 번째 타석이 돌아왔다. 1사2루. 나는 야마구치의 빠른 볼에 무의식중에 배트를 내밀었다.  손끝에 전해오는 짜릿한 느낌. 빠른 공을 때렸음에도 손에는 충격이 아니라 묘한 쾌감이 남아 있었다. 타구는 쭉쭉 뻗어 오른쪽 담장을 넘어갔다. 우익선심이 손을 들어 빙글빙글 돌렸다. 2점홈런이자 3천번째 안타였다.

은퇴 유보를 결정한 후 어느 날 왕정치가 찾아왔다. 그는 "장훈, 나는 이제 은퇴해야겠어"라고 밝혔다. 나와는 입단동기생으로 야구장을 떠나서도 둘도 없는 친구인 왕정치와는 같은 해 은퇴할 것을 약속한 사이. 나는 그와의 신의를 반드시 지키고 싶었으나 이미 그전에 신격호 구단주에게 1년 더 뛸 것을 약속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정을 설명, 왕정치는 그해 혼자 은퇴했다.
나는 1년 더 현역에서 뛰는 바람에 통산타율에서 3할 2푼대를 지키지 못하고 은퇴해야 했다. (통산타율 .31916). 그러나 23년간 나의 야구인생에 결코 후회는 없다.

<'나의 인생, 나의 야구 일본을 이긴 한국인 장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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